삶의 끝자락에서 만난 치매,

2025. 3. 13. 07:26카테고리 없음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뮤지컬의 주인공 춘자씨는 빨간색 스웨터에 ‘사스’ 신발을 신고 뽀글뽀글한 파마머리를 하고 다닌다. 시장이나 경로당, 작은 소도시 거리에서 쉽게 마주칠 법한 모습이다. 그 할머니가 95분 동안 무대에 서서 누구나, 언젠가, 걸어갈 길을 먼저 달려가 우리에게 닥칠 앞날을 한탄 섞인 독백과 코믹한 표정으로 알려 준다. ‘누구나’에 해당하는 관객들은 그의 연기에 과몰입하고, ‘언젠가’ 닥칠 그 일에 가슴 저린 공감을 하며 주머니를 더듬더듬 뒤져 손수건을 찾는다.

이 작품은 70살 어머니 생신을 맞아 고깃집에서 만난 가족들이 테이블 차례를 기다리는 잠 깐 사이에 사라진 어머니 춘자씨를 찾는 여정으로 전개된다. 치매로 인한 가족 간의 상실감 과 그동안 잊고 지냈던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해준다는 ‘당연한’ 결말 같지만, 배우들의 화끈한 연기와 애절한 가사, 다양한 장르의 노래 멜로디가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치매는 질병일까, 자연현상일까?

여기서 잠시, 치매를 단순한 질병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으로 이해할 것인지 생각해본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면서 겪는 신체적인 성장통이 있듯이, 노년에도 신체와 정신이 쇠퇴하면서 겪는 퇴화통이 있다면, 치매 역시 퇴화의 한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성장통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더 나은 상태로 옮겨가는 반면, 퇴화통은 회복이 아닌 점진적 상실로 이어진다는 차이가 있다.

만약 자연현상으로 본다면, 인간의 뇌도 신체의 일부라서 시간이 지나면 점진적으로 기능이 약해진다. 기억력 감퇴, 인지 기능 저하는 필연적이다. 이를 감안하면 치매는 노화의 일부로서,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가는 과정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완전히 자연현상이라고 하기에는 치매가 주는 고통과 사회적 부담이 너무나 크다.

그래서 치매는, 치료법이나 예방책이 연구되고 있다는 점에서 질병으로 분류된다. 그렇다고 치매를 완전히 질병으로만 다루면, 우리는 치매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치료해야 할 환자’로만 생각하고 그들이 삶의 의미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간과하게 될 것이다. 결국, 치매를 병이냐 자연현상이냐의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보다, 노화의 한 과정이면서도 극심한 경우 질병으로 간주하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에서 이해해야 한다. 치매를 겪고 있는 이들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보고, 함께 배려하며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70살 춘자씨는 영혼의 물고기가 준 묘약을 먹고 7살이 된다. 같은 사람에게 깃든 두 정체성이 만나는 장면이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김호근
 
 

정신줄 놓은 춘자씨의 독백

초등학교 앞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춘자씨는 자신이 당면한 상황과 피부로 느끼는 증상을 이렇게 읊조린다.

“몰랐어 늙는다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인지 몰랐어 늙는다는 게 이렇게 아픈 일인지
밥보다 약이 많고 약보다 한숨이 많아
낮에는 꾸벅꾸벅 밤에는 말똥말똥
울 때는 눈물이 안 나고 웃을 때 눈물이 나
음식은 들어가는 것보다 끼는 게 더 많아
겁이 나 너무 오래 살까 봐
무서워 죽는다는 게
두려워 애들 고생할까 봐
외로워 혼자 살아가는 게
허무해 이렇게 끝나는 게 지루해 매일매일
아쉬워 마지막 달력 한 장처럼
쓸쓸해 음소거한 티비처럼”

소변을 바지에 실수하고 매일 하던 소원 기도도 까맣게 까먹은 그는 점점 바보가 되는 자신을 보면서 한탄한다. 그때 만난 카센터의 와이퍼 친구들. 이들은 처음부터 와이퍼로 태어나지 않았다며 춘자씨에게 사연을 들려준다.

“예전에 우리는 시계탑의 시계 바늘이었지.
얘는 긴 바늘 나는 짧은 바늘
드넓은 청량리역 한복판에 우뚝 서 있었지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 춘천…
가는 곳은 달라도 모이는 곳은 하나
모두들 우릴 둘러싸고 재잘거렸지
모두들 우릴 우러러보며 기다렸지
예전에 우린 틀림 없었지
시간이 흘러 흘러 우리는 낡고 빛이 바랬지
칼처럼 정확했던 시계는 점점 느려지고
종종 멈춰지고 결국 내려왔지
그리고 우리는 와이퍼가 됐지
얘는 운전석 나는 조수석에서 살고 있지
눈도 비도 먼지도 치우며 살고 있어
그렇지만 우리가 시계탑의 정확한
시곗바늘이었다는 걸 지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우리의 소원이야”

남편과 딸이 있는 저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춘자씨의 부탁에 똥파리들이 다시 나이 먹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김호근
 
 

지금은 와이퍼로 전락한 두 친구가 열창하는 ‘예전에는’ 노래에서 우리는 물건이 수명을 다하면 용도가 바뀐다는 냉엄한 사실을 알게 된다. 떡볶이와 오뎅을 만들 때 번개손처럼 빨랐던 춘자씨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주관하는 세상에서 예외가 없는 불변의 법칙이다.

한편, 애타게 엄마를 찾아다니던 진수는 어려서 화재로 죽은 여동생 수정이 이름을 엄마가 부르고 다닌다는 소리에 골목 모퉁이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가슴 속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노래한다.

“몰랐어 그 이름 하나에 이렇게 힘이 빠질지
몰랐어 그 이름 하나에 이렇게 무너져 내릴지
약속처럼 그 누구도 부르지 않았던 이름
가슴 속 깊이 담아두고 묻어둔 그 이름
가끔은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부른 이름
너무 오래 부르지 않아 잊은 줄 알았던 이름
겁이 나 모두 내 탓 같아서
무서워 나를 미워할까 봐
두려워 매맞을까 봐 후회돼 내가 왜 그랬을까
억울해 그렇게 잘못한 걸까
괴로워 매일 매일이
그리운 뚱댕이 우리 울보 막내 수정이
미안해 고생만 한 우리 엄마”

배 타고 나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막내 수정이는 불난 집에 혼자 있다가 목숨을 잃고…. 상처로 뭉친 가족사의 봉인을 터뜨린 진수는, 장남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며 노래의 끝부분을 허밍으로 울부짖는다.

지금은 자동차 와이퍼 가 되었지만, 한때 시계탑의 시곗바늘이었던 두 친구가 춘자씨에게 사연을 이야기해준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김호근
복권, 땅, 사랑 등 무대 위의 간판들은 인간이 갖는 욕망의 집합체를 표상한다. 진수 부부의 춤과 노래 한판.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김호근
 
 

치매도 인식의 변화를 겪고

한때 ‘망령妄靈 들었다’는 표현을 썼던 치매. 그러나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전하면서, 치매는 단순한 노화가 아닌 신경퇴행성 질환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예전에 미국의 레이건 전 대통령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고 발표하면서 치매의 대표적 유형이 되었고, 그 이후 치매는 ‘장수의 그늘’로 인식되었다. 사실, 과거에는 지금처럼 치매 환자가 많지 않았다. 고령에 이르기도 전에 감염병이나 각종 질병으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더 연장되었고, 이와 함께 치매 환자 수도 급증했다. 대한민국의 치매 환자 수는 2020년 기준으로 65세 이상 중에 약 75만 명으로, 해당 연령대의 약 10%에 해당한다. 치매 환자 수는 매년 약 5만 명씩 증가하고 있어서 2024년에는 약 105만 명, 2030년에는 약 142만 명, 2070년에는 약 334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일반화되고 있음에도 치매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치매를 단순한 기억력 상실로 알거나, 질병의 특성상 사회에서 소외, 격리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경찰의 도움으로 엄마를 찾고 있는 진수와 성찬(배우 김대웅), 며느리(배우 하미미), 경찰(배우 양나은).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김호근
 
 

기억이 사라져도 분명히 남는 한 가지

뮤지컬의 마지막 장소는 우여곡절 끝에 엄마를 발견한 동네 교회의 예배당이다. 춘자씨는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 십자가 아래에서 생각난 소원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자식들 무병무탈하고 잘되게 해달라는 염원의 내용이었다. 이때다 싶었던 맏며느리는 시어머니께 떡볶이 레시피를 묻는다. 춘자씨는 “그게 뭐가 있겠냐. 우리 자식들 먹이려고 했던 거지.”라며 머뭇거리지 않고 답한다.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울린 떡볶이 맛의 비결은 사랑이었다. 치매는 인생이 걸어가는 한 과정이고 거기에는 질병, 아픔, 고통이 동반한다. 그러나 무대 위의 배우들은 슬픔만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기쁘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코믹터치가 곳곳에 많다. 죽음은 두렵고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가는 관문이다.

공연을 보며 친한 친구가 생각났다. 최근 친정엄마의 치매 때문에 말할 수 없는 번민을 하고 있던 친구가 해준 이야기가 있다.

“맨처음엔 너무 괴로웠어. 엄마가 왜 저러시지? 나의 보호자였는데 이제 내가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 믿기지 않았어. 열심히 살펴드리고 열심히 효도하면 나아지겠지,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 오시겠지 기대했어. 그런데 그것은 나의 착각이고 나의 희망사항일뿐임을 나중에 알았어. 치매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것을 섭리로 받아들일 때 해결되는 것 같아.”

하루에 백 번도 넘게 딸에게 전화를 하는 친구의 엄마. 직장에 다니는 친구는 일하느라 못 받을 때도 있지만 때론 안 받기도 한단다. 그러다 미안해서 연락을 드리면 엄마는 세상에서 처음 받는 전화처럼 반가워하신다고 한다. 누구는 그런 엄마의 반응을 정신적인 테러가 아니냐고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다르게 보인다.

지금 세상에서 나한테 보고 싶다며 매일 전화를 꾸준히 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춘자씨나 친구 엄마나 사랑의 표현법이 바뀐 것뿐이지, 본질적인 사랑 자체가 달라진 건 아니다. 그걸 받아들이면 살아계신 엄마 덕분에 행복한 사람이 된다.

사진 박가원 객원기자
 
 

배우들의 한마디

뮤지컬 공식 오픈 하루 전날, 기자들을 위한 프레스 콜 무대가 있었다. 공연 후 이어진 기자회견의 질의응답에서 연출가와 출연진의 소감을 듣는다. 

오미영. 사진 박가원 객원기자
 
 

오미영, 작/연출

치매라는 소재가 주는 연극성이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처음 접근했는데, 치매를 공부할수록 굉장히 조심스럽고 아픈 병이었어요. 그래서 글을 쓰면서 오래 고민했어요. 나이 들면 피부엔 주름이 지지만 뇌의 주름은 펴져서 생기는 병이 치매라는 것을 알게 됐고 결국 노화의 과정이구나 싶었죠. 이 뮤지컬은 늙어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항상 부모님의 보호를 받았는데 어느새 저도 보호자 입장이 된 지금, 치매 가족으로 힘든 중년들에게 같이 힘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서 위로를 주고 싶었습니다.

김준현. 사진 박가원 객원기자
 
 

김준현 큰아들 홍진수 역

코미디 무대는 많이 해봤지만 뮤지컬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딱 하나예요. 무대에 올라가기 전의 설렘이죠. 음악 감독께서 이런 멋진 얘기를 해주셨어요. “우리는 천 잔의 커피를 마셨지만 관객은 첫 잔의 커피를 마신다.” 나와 처음 만나는 관객에게 내가 오랫동안 준비한 것을 처음 선보이는 거 잖아요. 그 설렘 때문에 무대에 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코미디와 다른 점이라면 홍진수라는 역할이 진지한 캐릭터라서 감정 라인이 분명하게 흘러가야 하거든요. 그게 저한테는 쉽지 않았지만, 저도 연기를 하면서 같이 감동하고 있습니다.

서나영. 사진 박가원 객원기자
 
 

서나영 치매 노인 고춘자 역

아버지가 치매로 돌아가신 지 이제 1년이 조금 넘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 달 지난 때에 이 대본을 받았죠. 처음에 대본을 보면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계셨을 때의 눈빛, 저를 바라보실 때의 눈빛, 무언가 질문할 때의 눈빛을 아직 제가 고스란히 기억하거든요. 그래서 이 역할을 할 때 도움이 됐어요. 며칠 전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처음 보였어요. 제가 이번에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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