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에게 '놀이'를 허하라

2025. 1. 6. 20:36카테고리 없음

아동기의 대전환 시대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놀이하는 인간’을 뜻한다. 인간의 중요한 ‘본질’이자 ‘욕구’가 ‘놀이’에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의 모든 토대를 형성해 가는 아동 · 청소년기에 놀이가 지니는 가치와 중요성을 살펴본다.

‘놀이’를 ‘학습’하는 요즘 아이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 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아침에 눈 뜨면 마을 앞 공터에 모여 매일 만나는 그 친구들 비싸고 멋진 장난감 하나 없어도 하루 종일 재미있었어

영화 ‘선생 김봉두’에 등장했던 ‘보물’이라는 노래 가사의 도입 부분이다. 40대 중반 이상의 성인이라면 이 노래 가사 내용과 같은 유년 시절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냅다 가방을 던져 놓고 엄마가 동네 골목에서 “00야, 밥 먹어라!”라고 소리칠 때까지 실컷 놀았던 경험.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아이들의 정서적, 신체적 특성에 맞도록 설계된 동네 놀이터에서는 초등학생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각기 학원으로 달려가고, 짬을 내서 친구들을 만나도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 스마트폰 게임에 몰두한다.

그래서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놀이’를 가르친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전래놀이 시간이 따로 있다. ‘이런 게 무슨 수업이야?’ 할 정도로 수업내용은 단순하다. 부모 세대들이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자연스럽게 했던 사방치기, 비사치기, 고누, 딱지치기 등을 규칙과 질서, 예절을 지켜 친구들과 노는 것이 수업의 전부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정규 수업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놀이’를 가르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놀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요즘 아이들의 일상에서는 여러 문제가 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때 견디지 못해 분노를 표출하는 아이들, 친구들 사이의 사소한 갈등을 처리하지 못해 폭력이나 욕설 등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아이들, 협력보다 경쟁을 우선시하며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아이들. 물론 이 모든 문제가 모두 ‘놀이’와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동기의 놀이는 생각 이상으로 아이들의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놀이’를 잃어버린 요즘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사진 프리픽

누가 아이들에게서 놀이를 빼앗아 갔는가?

2024년 7월에 출간된 《불안 세대》의 작가 조너선 하이트는 아동기의 대재편을 언급하고 있다. 1980년대를 시작으로 청소년 대다수가 스마트폰을 소유하게 된 2010년 중반까지 아동기의 기반이 ‘놀이 중심’에서 ‘스마트폰’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세상이 현실 세계에서 가상 세계로 옮겨진 것이다. 이것은 아동기의 정신적, 정서적 발달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변화이다. 그렇다면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조너선 하이트는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의 기회비용으로 네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 번째는 사회적 박탈이다.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의 아이들은 친구들과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함께 놀면서 사회적 발달을 촉진하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스마트폰 화면에서는 친구들의 표정 변화도, 동작도, 목소리 크기 변화도 포착할 수 없다. SNS에서 누르는 ‘좋아요’ 버튼과 대화창의 이모티콘은 타인과의 대화에서 필수적인 비언어적 상호작용을 대체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수면 박탈이다. 이는 단순히 수면시간이 줄어들어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하는 것만 뜻하진 않는다. 수면 부족 상태가 지속되면 우울증, 불안과 같은 정신 질환이 나타날 수 있다. 실제로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오전 수업 시간에 유독 졸거나 축 처져 있는 학생들이 있다. 대부분 취침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부모님 몰래 스마트폰을 하는 친구들이다.

세 번째는 주의 분산이다.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수백 건의 알림 신호 때문에 아이들은 방해받지 않고 과제에 몰입하며 계속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긴다. 네 번째는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중독’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중독 연구자 애나 렘키 교수는 저서 《도파민네이션》에서 스마트폰을 ‘디지털 도파민을 하루 24시간씩 일주일 내내 공급하는 현대판 피하 주사기’라고 비유했다. 이처럼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로의 대전환은 아이들이 실제로 살아갈 현실 세계에 뿌리를 내리면서 성인이 될 때까지 반드시 체화해야 할 공동체의 규범, 대인 관계기술 등을 배울 기회를 박탈하면서 아이들의 정신 건강을 악화시키고 있다.

아이들에게서 제대로 된 놀이를 빼앗은 것은 스마트폰뿐만이 아니다. 자녀들이 신체적, 정서적으로 항상 안전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일부 양육자의 잘못된 태도에도 있다. 물론, 아이들은 신체적, 정서적으로 안전한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 하지만 아이가 상처받지 않고 꽃길만 걸을 수 있도록 양육자가 앞서서 자녀 앞의 어려움들을 먼저 처리해 주는 태도는 위험하다. 면역계가 병원체에 노출되어야 하고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아이들은 좌절과 실패, 충격과 실수에 노출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법과 갈등과 좌절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율성을 덜 부여하고 아이들의 놀이부터 교우 관계까지 모든 부분을 통제하려 하는 태도는 아이들이 잘못될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다. 두려움과 불안이 기저에 깔린 부모의 양육 태도와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하는 아이들의 세계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아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놀이 기반 아동기를 보낼 때 가장 잘 자랄 수 있다.

사진 프리픽

제대로 된 자유 놀이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

놀이의 영단어인 ‘플레이play’의 어원은 갈증이라는 뜻의 라틴어 ‘플라가plaga’에서 유래한다. 즉, 놀이는 목마른 이가 물을 마시듯, 아이들이 그저 ‘하고 싶어서’ 특별한 목적 없이 그 자체를 위해 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고 있는 모습을 관찰하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남학생들에게는 별다른 놀잇감이 필요 없다. 주로 몸을 쓰면서 논다. 이 과정에서 신체를 움직이면서 어떤 행동이 위험한지, 어떤 행동에서 다칠 수 있는지 실제로 경험하며 자신과 친구들의 신체를 돌보는 방법을 배운다. 또한, 교실에 수십 개의 보드게임이 있어도 아이들은 본인들이 창조해 낸 놀이를 더 좋아한다. 종이 한 장만 있어도, 공깃돌 하나만 있어도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별의별 놀잇감을 만들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논다.

저학년의 놀이와 고학년의 놀이 역시 다르다. 저학년의 놀이 활동에서는 교사의 개입이 필연적이다. 신체 활동이 능숙하지 못해 자주 다치기도 하며,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하고 규칙이 내면화되지 않아 수시로 다툼과 싸움이 반복된다. 그 과정에서 서툴지만, 아이들은 조금씩 친구들의 감정을 읽고 규칙을 이해하여 내면화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 시기를 거쳐 제대로 노는 방법을 배운 고학년의 놀이는 훨씬 즐겁고 능동적이고 활기차다. 상처를 참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다른 친구들의 감정을 읽고, 차례를 지키고, 갈등을 해결하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룰 줄도 안다.

그리고 놀이를 통해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고 즐겁게 다시 시도하면서 앞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들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도 키워나간다. 어쩌면 영어 단어를 외우고, 복잡한 수학 문제를 잘 푸는 것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더 중요하고 필요한 기술-좌절 내구력, 자제력, 사고력, 창의성, 대인관계능력-을 놀이로 습득하는 것이다. 2013년 방영되었던 EBS 다큐프라임 ‘놀이의 반란’에서는 놀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은 훗날 아이가 커서 사회에 나갔을 때 또 한 번 겪고 행해야 하는 ‘생존의 기술’로 설명하고 있다. 즉, ‘놀 줄 모른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생존의 기술을 모른다’와 같다는 뜻이다. 스마트폰이 꺼진 현실 세계에서 아이들은 즐겁고 행복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아이들에게 놀이를 허하라!

요즘 우리 반 아이들은 체육 시간에 비접촉식 태그 럭비 게임을 하고 있다. 아시다시피, 럭비는 신체적으로 위험이 따를 수 있는 운동이다. 학생들 수준에 맞게 난이도를 낮춰 활동하고 있지만 때로는 과격하거나 위험한 동작이 나올 때도 많다. 처음엔 허리에 차고 있는 자신의 태그를 떼어 내려고 달려오는 친구들을 무서워하거나, 평소 익숙하지 않은 럭비공이 자신에게 향하면 두려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학기가 지나자 이 시간은 여학생들마저도 일주일 중 제일 기다리는 시간이 됐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숨이 턱까지 올라와도 끝까지 달리는 끈기, 터치다운을 성공시키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는 전략회의, 터치다운을 성공시키고 난 후 함께 나누는 기쁨의 하이 파이브. 패스를 실패해서 공격권이 상대방으로 넘어가도 실수한 친구에게 “괜찮아.”라고 마음을 건넬 수 있는 여유, 못한 친구를 비난하기보다 격려해 주는 넓은 마음, 승패와 상관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마음. 게임을 하면서 자신과 친구들을 이해하는 모습들이 늘어나는 것을 볼 때마다 교사로서 행복하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곧 행복이다.

글쓴이 조아라

21년차 초등학교 교사로 어린이와 청소년의 인성교육 및 문해력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마인드교육 전문 강사로서 2016년 교육연수원에서 공무원 및 복직 교사를 위한 연수를 진행했으며 세계 대학총장포럼 및 교육자포럼에서 프로그램 퍼실리테이터로서 활동했다. 2024년에는 필리핀 교육관계자 대상으로 마인드강연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