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이 어느덧 우크라이나까지

2024. 12. 21. 11:00카테고리 없음

 

무대의상 디자이너, 김옥희

처음에는 바느질 한 땀이었다. 내 가족 먹여 살리려는 생계형 바느질 한 땀 말이다. 하지만 21살에 개업한 의상실에 45년의 세월이 쌓이는 동안, 김옥희 디자이너의 품은 열 땀, 스무 땀, 자꾸만 커져 갔다. 지금 그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월드브릿지의 이사로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구호물품 보내는 후원자이자 연결자로 활동한다. 개인적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중미 등지에 무대의상을 보내고, 대전광역시 중촌동 맞춤복 거리의 발전을 도맡은 상인회 회장으로도 열일 중이다. 얼핏 보면 프로N잡러 같지만, 그의 ‘일’은 노동의 대가를 받는 ‘업’과는 결이 사뭇 다르다. 여전히 의상실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자영업자이지만 그가 가진 여러 직함들의 공통점은 ‘기부’로 모아진다.

 

김옥희_기부를 통해 국내외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준 사람. 45년간 샬롬 의상실을 운영한 무대의상 디자이너. 합창복, 뮤지컬복, 댄스복 등 여러 단체의 무대의상을 지원하였으며 (사)월드브릿지의 이사로서 우크라이나를 후원하는 일에 함께하고 있다. 자신의 시간, 재능, 물질을 나눔함으로써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
 

우크라이나로 세 번째 구호물품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긴 전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많은 물품이 필요할 것 같아서 주변 사람들과 뜻을 모아 물품을 기부하고 있어요. 저의 주된 역할은 ‘연결’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지금 많이 추워서 따뜻한 옷이 필요하대요.”, 커뮤니티에 이런 글을 올리면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면서 순식간에 옷이 모아져요. 멀리서 택배로 보내주는 분들도 있고요. 우리 소식을 들은 기업들은 물티슈, 휴지, 기저귀, 분유 등을 보내주기도 해요. 이런저런 물품들을 차곡차곡 넣으니 나중에는 컨테이너에 물건이 다 못 들어가요.(웃음)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더라고요. 그동안 두 차례 컨테이너가 갔고 이제 세 번째로 40피트 컨테이너 보내기 작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전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진 프리픽
 

지금 같이 일하고 있는 월드브릿지는 어떤 단체인가요?

 

외교부 소속의 비영리사단법인이고요. 전 세계 이웃을 위한 다양한 나눔활동을 하고 있어요. 국제 민간기관과 협력해서 아동, 청소년 센터를 지원하거나 긴급 구호를 돕고 있어요. 특히 전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많이 지원합니다. 국내에서는 소외계층을 위한 물품 후원, 다문화가정 소통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어요. 건강한 글로벌 사회를 만들고자 많은 분들이 마음을 모으고 있어요.

 

이렇게 베풀 수 있는 비밀이 있나요?

 

사실 저에게 나눔은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가령 저는 옷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옷에 관한 콘텐츠를 많이 봐요. 다큐멘터리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를 보니까 세상에 버려진 옷들이 너무나 많아서 지구가 아파하고 있더라고요. 패스트푸드만이 아니라 쉽게 옷을 사고 쉽게 옷을 버리는 패스트 패션의 문제가 심각해요.

 

하지만 아프리카 오지에서는 옷과 신발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잖아요. 제가 ‘샬롬’이라는 의상실을 40년 넘게 하고 있는데요. 히브리어 샬롬은 평화를 뜻하는데, 그 어원이 ‘공정한 나눔’이라고 해요. 한쪽에는 쌓여 있고 다른 쪽은 비어 있다면 평화가 아닌 거죠. ‘한쪽에 몰린 것을 부족한 곳으로 보내자. 나누자.’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찾아오더라고요.

 

그가 이사로 있는 월드브릿지에서 우크라이나에 보낼 구호물품을 컨테이너에 싣고 있다. 개인, 기업의 후원을 받았다. 사진제공 월드브릿지 
 

해외 여러 단체에 무대의상을 개인적으로 기부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것도 30년 가까이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기엔 무척 특별해 보여요.

 

제가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건 옷이에요. 재능은 없었지만 한자리에 계속 머문 탓에 수월하게 옷을 만들 수 있었고,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준 덕에 부유한 가게가 됐어요. 대지진이 난 후 나라가 파괴된 아이티에서 20명의 성가대원이 합창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합창단복을 만들어 보내드린 일이 있어요. 그들이 너무나 행복해하는 거예요.

 

아프리카, 중앙아시아와 같은 곳에도 어렵게 공연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무대의상을 보내드렸는데 그 옷을 입고 대회에 나가 상을 받거나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꾸준히 들려오더라고요. 정말 신이 나고 보람차요. 국내 한 합창단의 무대의상을 지원하는 일을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할 수 있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이 합창단원 역시 모두 자원봉사자들이에요. 자신의 삶과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드리고 있는 그들에 비해 저는 넘치게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눠드린 것뿐이니, 제가 지금 인터뷰하는 것 자체가 많이 부끄럽죠.

물품을 받은 우크라이나 현지 모습. 사진 제공 월드브릿지
물품을 받은 우크라이나 현지 모습. 사진 제공 월드브릿지
 

‘많이 받고, 넘치게 가지고 있다’, 이 말씀을 계속하고 있어요.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아요.

 

저는 특히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어머니는 삶은 가난했지만 마음은 부유한 분이셨어요. 친정아버지께 사랑을 많이 받으셨다고 하는데 사랑받은 기억이 평생의 자산이 되어서 자부심 있게 사셨어요. 짜증이나 화를 부리는 것없이 우리 4남매를 넉넉히 안아주셨고, 다른 사람에게 많이 베풀고 사셨고요. “돈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 하며 물질에 마음 뺏기지 않았고요. 그런 어머니가 제 의식과 무의식에서 큰 가르침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아요. 의상실을 연 것도 어머니 덕분이고요.

 

구체적인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의 유년 시절, 어머니가 어렵게 구해 준 소년조선일보를 읽는 것이 조그마한 낙이었어요. 한 손에는 부지깽이를 들고 아궁이의 불을 때면서도 나머지 한 손으로 책을 들고 읽던 어머니는 자식의 손에도 책을 들려주고 싶으셨어요. 덕분에 독서는 제 습관이 되었고, 눈이 어두워진 지금의 나이에도 밤마다 오디오북을 들을 정도로 책과 가까운 사람이 됐네요.

 

여하튼 매일 글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소년조선일보를 정독하면서 커다란 세상을 보았어요. 거기서 학교의 교복, 공연팀의 무대의상 등을 사진으로 보면서 그 색감과 분위기가 신기해 한동안 머릿속에서 서성이더라고요. 단체복을 만들게 될 거라는 운명적인 예감이었을까요.(웃음)

 

그 황홀함도 잠시뿐, 4남매의 맏이로서 궁핍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구미 전자 공단에서 돈을 벌고 있는데 어머니가 결단한 듯 말을 꺼내셨어요. “앞으로 기혼 여성도 일을 하는 시대가 올 거야. 누구라도 다 할 수 있는 일 말고 너 아니면 안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하시며 의상실을 하고 있는 어머니 친구를 소개해 주셨어요. 제 나이 19살이었고 그때부터 옷 만드는 기술을 배워 21살에 작은 양장점을 열었어요. 그 후 45년간 옷 만드는 우물만 파고 있네요.(웃음)

 

삶에서 어머니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나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어려서 독서를 하며 천 개의 인생과 만났다고 할까요. 책 속의 비극적인 주인공들을 보면서 ‘그들에 비해 나는 얼마나 가진 게 많은 사람인가.’ 이 깨달음이 조용히 찾아오더라고요. 날 사랑하는 부모님, 할머니, 형제가 곁에 있다는 것, 머물 집과 건강한 몸이 있다는 것, 그것을 허락한 인생에 감사를 드렸어요.

 

그리고 성년이 되어 교회에 나가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알게 되면서 삶을 향한 감사는 더욱 깊어졌고요. 거저 받은 인생인 것을 알게 되니 거저 줄 수 있겠더라고요.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넘치게 받은 것을 남에게 주는 일에 거리낌이 사라진 것은요.

 

또 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면서 이웃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마을 어르신들은 새댁이 고생한다고 기저귀도 개 주고 간식도 챙겨 주시고, 어떤 손님은 옷을 맞추러 왔다가 빨래를 개 주기도, 아이들 숙제도 봐 주기도 했어요.(웃음) 옆집 상인들과 일터이자 보살핌 공간인 이곳에서 아이들을 함께 키워냈고요. 나 어려울 때 이 사람이 도와줘서 내가 이만큼 살고 있다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다들 있어요. 그렇게 내가 받은 게 얼마나 많은 사람인지를 ‘발견’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일터이자 기부 인생 원천인 샬롬의상실에서 재단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중촌동 맞춤복 거리 상인회 회장으로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고 계세요.

 

상인회 회의가 열리면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그런지, 어쩌다 상인회 회장을 한 지 10년이 됐어요. 처음에 뭐라도 하자 하며 상인대학을 시작했는데 아주 재미가 있더군요. 하루 16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을 견디며 자식들을 대학, 대학원까지 보냈지만 정작 맞춤복 거리의 엄마들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컸어요.

 

하루 일과가 끝난 저녁 6시면 좁은 골목 안에 있는 식당은 대학교 강의실로 변신했죠. 거기서 수업을 들으며 공부를 하고, 때로는 수학여행에, 다른 도시로 견학도 가고…그렇게 상인회가 결속이 되더라고요. 그러던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맞춤복 거리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어요. 안식년과 함께 기부 문화가 찾아온 거예요.

 

코로나, 안식년, 기부 문화, 3개의 상관관계가 궁금합니다.

 

이전의 자영업자들 사이에서는 ‘자원봉사’, ‘재능기부’ 이런 것이 생소했어요. 그러다가 코로나가 생기면서 맞춤복 거리 상인들의 일감이 싹 사라졌어요. 무대의상 전문 디자이너가 많았던 터라 코로나로 모든 무대가 사라지자 안식년 같은 휴식기가 찾아온 거예요. 일이 없어 TV를 틀어놓고 있는데 마스크를 사려고 줄을 서는 사람들을 온 종일 보게 되더라고요.

 

‘천으로 마스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구청에 연락해 의견을 드렸고, 자원봉사팀과 함께 우리 상인들이 마스크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저녁에 동네 한 바퀴 돌아보면 돈을 받는 일이 아닌데도 거의 모든 의상실에서 마스크를 만들고 있어요. “쉬고 싶지 않으세요?” 하고 물으니 “우리도 기부라는 것을 해보고, 재밌어요.” 하는 말이 돌아오더라고요. 울컥했어요.

 

그렇게 두 달을 마스크만 만들던 때가 있었어요. 우리 맞춤복 거리 상인들이 봉사, 기부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된 거예요. 코로나가 끝났어도 김장 기부도 하고, 할머니들 옷을 지어 나눠드리며 나눔을 하고 있어요. 또 상인들이 제가 하는 월드브릿지 활동에 관심이 많아 컨테이너에 실을 옷이며 물품들도 지원해 주세요. 정말 고맙죠.

 

상인회 활동도 모두 기부인가요?

 

저뿐만 아니라 상인회와 관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보수로 일하고 있어요. 시간, 재능, 때로는 물질도 들어가지만 지역사회가 발전하면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잖아요. 한때 전국에서 손님이 몰려 100여 곳이 넘어가던 양장점이 지금은 줄어 40여 곳이 남아 있어요. 기성복이 시장을 점령해 가면서 저희가 설 자리가 많이 줄었지만 끝까지 이 거리를 지켜내려고 해요. 젊은 사람들이 맞춤복 거리에서 창업을 하고, 우리 상인들도 후계자를 키우며 다 함께 희망을 발견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부의 삶, 솔직히 어려운 부분이 없으세요?

 

저의 일 중심에 ‘사람’이 있어요. 제가 하는 맞춤복은 지나가다가 마음에 들면 툭 사는 기성품과는 달라요. 시간을 들여 천을 만지며 옷을 생각하고 그 옷을 입을 사람을 생각해야 하거든요. 고민도 많고 생각도 깊어지지만 결국 사람과 마음으로 만나져요.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모나기도, 무관심하기도 해서 제 마음을 아프게도 하지만 마음을 닫아서 세상을 잃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요. 나를 낮추고 열어서 사람의 마음을 얻어 가고 싶어요. 그런데 제 곁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하루가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 가능하다는 거, 다른 사람을 붙드는 것은 곧 나를 돕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분들이에요. 그런 좋은 사람들을 얻은 게 제 복이라면 복이죠. 컨테이너는 언제 가냐며 먼저 물어봐 주시고 같이 애써주시는 분들, 제가 한 게 없는데도 고맙다며 마음을 주시는 분들, “이것으로 따뜻한 겨울을 보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먼 곳에서 전해지는 소식과 사진들. 뭉클해요. 민들레 씨앗처럼 나눌수록 자꾸 커져 갑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고요.

품이 크세요.

 

그냥 꾀부리는 거 없이 허락된 그 자리에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자리를 지킨다’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저에게 이것은 묵묵히 살아내는 거예요. 엄마가 엄마의 자리에 있는 거, 일하는 사람이 매일 출근하여 자기 자리에 있는 거, 농부는 밭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시장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는 것이 아름답더라고요.

 

그 자리에는 높고 낮은 차이는 없어요. 자체로 귀한 것이지요. 저는 단지 인생이 데려다 놓은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렸을 뿐이에요. 식물처럼요.(웃음) 45년 맞춤복 디자이너로, 10년 지기 상인회 회장으로, 30년 지기 무대의상 후원자로 그냥 한눈팔지 않았을 뿐인데 신기한 일이 생기더라고요. 처음 맞춤복 거리에 들어왔을 때 남의 집 연탄 창고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제 의상실이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됐어요. 제일 좋은 자동차를 타며, 세상 곳곳을 누비고요. 놀라워요.

 

신기한 기부다. 나눌수록 풍요로워졌다는 그 말이 크게 들렸다. 또 자신을 붙박이 식물로 묘사한 김옥희 디자이너는 이렇게 덧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 사는 나무가 레드우드라고 해요. 땅 밑에 뿌리가 깊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뻗어가 엉겨있음으로 모든 태풍을 이겨낸다고 합니다. 제가 잘해서, 강해서가 아니라 부모님, 남편과 아이들, 이웃들이 나와 함께해줬어요. 언제나 돕는 손길이 있었기에 제가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엉겨 있음’, ‘관계’로 말미암아 자신이 튼튼히 서 있을 수 있었다고 선을 두었다.

 

혹자는 “그런데 한자리에 오래 서 있는 거, 답답하지 않아요?” 이렇게 물을 것 같고, 이 질문을 받은 그는 빙그레 웃을 것 같다. 자신이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이기도 한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이곳저곳을 날아 생명을 틔우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민들레 씨앗, 김옥희 씨는 오늘도 자유롭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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