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9. 22:55ㆍ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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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하쿠나 마타타'
탄자니아 해외봉사 단원 최예은
영화 '라이온 킹'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끝없이 펼쳐진 야생동물원 '세렝게티', 만년설
로 하얗게 빛나는 산 '킬리만자로' 등으로 잘 알려진 탄자니아. 경이롭고 아름다운 자연 생
태계도 좋지만, 이 나라 사람들이 매력적이어서 더욱더 좋다. 그들의 매력에 푹 빠져서 2년
째 탄자니아에 머물고 있다는 최예은 씨, 자신의 앞날에 대해 '하쿠나 마타타'(문제없어)라
고 말하는 그를 화상으로 만나본다
반갑습니다. 탄자니아로 봉사를 간 이유가 있을 까요?
저는 인생의 절반을 미술을 하며 보냈어요. 그림을 그릴 때 행복을 느꼈고, 많은 대회에 나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죠.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미술교육학과 진학을 목표로 본격적인 입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입시 시험을 3개월 앞두고 제가 지금까지 준비해온 방식
이잘 못되었고, 제가 원하던 학교에 진학하기 힘들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미술교육
학과에 진학하지 않는 이상 미술은 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저는 그때 물감과 붓을
다 놓아버렸어요. 모든 자신감을 잃었고, 나는 무엇을 해도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진로를 급회전해서 저는 치위생학과에 입학했어요. 취업이 잘 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직업
이라는 이유에서 고른 전공이었죠. 하지만 그림만 그려온 제가 치위생학과에 적응하기는 굉
장히 어려웠어요. 생소한 분야의 공부가 결코 쉽지 않았고, 저는 여태껏 받아 본적이 없는 성
적을 받았죠. 대학생이 되어 첫해를 이런 혼란 속에 보내고 있던 중, 친구와 굿뉴스코 해외봉
사단 설명회에 갔어요. 거기서 어느 봉사단원의 체험담을 들었습니다.그 단원은 봉사를 하러
갔는데, 그 나라에서 에상치 못한 큰 행복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듣던 제가 굉장히
널랐지요. '1년 동안 무엇을 했기에 그토록 행복하다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한국
에서의 대학 생활을 잠시 내려놓고 저도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 봉사활동을 지원했어요.
'이왕에 할 봉사라면 어려운 나라에 가서 제대로 고생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아프리카를 생
각했고, 그중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와 세렝게티 국립공원, 인도양의 진주 진지바르 섬
까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탄자니아를 선택 했어요.
그곳에서 주로 어떤 활동을 했나요?
저는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첫 번 째로는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일을 했어
요. 지부장님과 함께 우연히 국제사립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제 소개를
하던 중 미술을 오랫동안 공부했던 것을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마침 우리 학교에 미술 선생
님이 필요 했는데 잘 됐다,"고 하셔서 저는 다음날 부터 6개월 동안 국제 사립학교에서 미술
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어요.(웃음)
탄자니아에서의 첫 번째 활동인 만큼 잘하고 싶었습니다. 중,고등학교 4개학급의 미술 수
업을 맡았는데, 저는 이전에 입시를 준비하며 배웠던 내용을 아이들에게 알려 주면서 정말
감사했어요. 또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학생들을 보니 가슴이 벅처더라고요. 긴
시간 동안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바랐던 미술교사의 꿈을 탄자니아에서 이룰 수 있었던 것
이 지금 생각해도 설레고 놀라워요.
교장 선생님이 학교에 벽화를 부탁하셔서 한 달간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국제학교 인 만
큼 터키, 인도, 탄자니아 중국 등 국적이 다양한 학생들이 모여 있어서 저는 세계적으로 유
명한 랜드마크들을 모아 그렸습니다. 벽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날씨가 무덥고 식사할 곳도
마땅치 않아서, 바닥에 주저앉아 쉬거나간단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 적도 많았죠. 하지만
고생 끝에 탄생한 벽화로 인해 칙칙했던 학교 벽면이 활기를 띄었고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벽
화 덕분에 기분 좋게 등하교를 한다며 칭찬해 주셨어요.
저는 미술 교사 외에 한국어, 태권도 선생님으로도 활동했어요. 워낙 성격이 소심한 저는 사
람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제 실수와 부족한 점을 드러내는 게 싫었고 와벽하게 해
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곳 탄자니아에서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
을 피할 수 없었어요. 모든 것들이 처음이라서 시작하기도 전에 걱정스럽고 막막할 때가 많
더라고요. 그래도 지부장님의 도움과 현지 친구들의 격려로 그 상황에 부딪쳐보니 별게 아
닌 일들이었어요. 학생들은 제가 잘 가르치든지 못 가르치든지 상관없이 제 수업을 모두 경
청헤 주고 좋아했어요. 그런 학생들의 모습에 제가 갖고 있던 두려움이 사그라들고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렇게 여러가지 일들을 해내고 나니 '나도 충분히 할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
이 생겼고, 계속 도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큰 감동을 받았던 장소가 있었나요?
'마냐라'라는 깊은 시골 마을에서 어린이 캠프를 열어 아이들에게 영어와 스와힐리어 노래
를 가르친 적이 있어요. 그곳의 길은 모래로 뒤덮혀 사막을 걷는 것 같았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제가 들고 가던 짐들이 먼지로 뒤덮이기도 했어요. 며칠 묵으러 간 집의 화장실
과 방은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흙을 덮어서 만든 재래식 화장실에, 철판을 지붕삼아 덮어둔
방은 마치 창고 같았어요. 침대 위에는 도마뱀 배설물이 나뒹굴고, 주변엔 바퀴벌레들이 돌
아 다니고 있었는데 제 가방에 들어갈까 봐 가방 문을 꼭 닫아두었죠. 어린이 캠프 첫날밤은
집에 돌아가고만 싶더라고요.
그러나 다음날 아침, 산책을 하며 둘러본 시골의 풍경은 장관이었어요. 쏟아지는 햇살을 받
으며 활짝 피어있는 해바라기가 드넓게 펼쳐져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어요. 집
집마다 들러 인사를 했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따뜻하게 맞아주었어요. 굉장히 가난한 마을
인데 제가 방문할 때마다 너무나 귀한 고기 요리를 해주시는 거예요. 과분한 대접을 받았죠.
캠프를 마치고 떠나는 날, 마을 사람들이 배웅을 나왔고 그곳에서 유명한 땅콩도 챙겨 주셨
어요.
'내가 뭐라고 이렇게 좋아해 주고 귀한 대접을 해 주실까?' 피부색도, 언어도, 모든 것이 다르
지만 마냐라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낡고 허름한 집에서 불평만 했던 제
가 부끄러웠고, 그런 집에서도 배불리 먹고 잠잘 수 있었던 것이 그제야 감사했어요. 마냐라
여행을 그곳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안전하게 마무리 할 수 있었고, 짧은 일주일이었지만 탄자
니아를 강하게 경험할 수 있었어요.
탄자니아 사람들을 알아갈수록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이곳 사람들은 '폴레 폴레(천천히)', '함나 쉬다(문제 없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느긋하고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요. '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제가 그 모습을 보면 너무 답답하
고 힘이 빠지기도 했죠. 학생들은 아카데미 수엄을 할 때나, 행사 준비를 할 때에도 느지막이
모였고, '정해놓은 시간까지 끝내야겠다.'하고 재빠르게 행동하는 일이 별로 없어요. 점심은
2시나 3시에 먹고, 저녁은 밤 9시가 넘어서 먹기도 해요. 그런 것들이 답답하긴 했지만 제가
보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탄자니아 사람들늬 여유로움에 저도 함께 따라가 보았어요. 신기
한 건, 걱정했던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고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거예요. 그 뒤
로 저는 그들의 문화와 함께 하면서 조금 더 여유를 갖게 되었어요.
'하라카하라카 하이나 바라카' 번역하면, '서두르면 축복이 없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탄자
니아 속담이 있어요. '급할수록 부지런히 얼른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제 습관과 이 속담의 뜻
은 전혀 달랐어요. 무언가를 할 때 갑자기 속도를 내면 조바심이 나서 제가 놓치는 부분이 새
기고 실수가 많아졌어요. 서둘러서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시작하는 것조차 버겁고 또 나의
기준에 완벽하게 맞지 않으면 애초에 시작하기도 싫더라고요. 그런 제 모습 때문에 저와 함
께하는 사람들은 지칠 때가 있었어요. 이 경험을 염두에 두고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
히 하나하나 풀어갔을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들의 삶에 배어있는 속담의 교훈과 현지인들의 문화에 맞추어 차근차근 해나가니, 처음
에는 화나고 짜증나던 일도 별거 아닐 때가 많았어요. 그리고 저와 정반대인 그들의 삶과 습
관에 한께 해보니 더 얻어 가는 것이 많더라고요. 어려움도 있지만 이런 재미들로 인해 지금
까지 탄자니아에 머물를 수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또 언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이 삶에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답니다.
마음에 강하게 남아 있는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지부장님이 저한테 해준 말씀 중에 "너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났다고 생각하는구나." 하는
말이 크게 들렸어요. 가장 하기 싫었던 활동이 아카데미 수업 때 댄스를 가르치는 일이었어
요. 제가 내성적인 성격인데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지부장님께 하기 싫다
고 말씀드린 적이 있거든요. 그러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고, 그 말이 너무 억울했어요.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 말을 통해 제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
지 돌아볼 수 있었어요.
저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남의 일에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겉으로는 부드러운
척하지만 사실은 제가 원하는 대로만 하며 살았던 거죠. 저를 돌아보니 이렇게 계속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하기 싫은 것도 해보면서 제 한계를 뛰어넘어 보고,
제 생각도 던져 보았어요. 막상 그토록 하기 싫은 것도 해보았더니 댄스를 하며 즐거워하는
나 자신과 학생들을 볼 수 있었고, 함께 마음을 나누며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어요.
탄자니아에서 2년째 지내고 있다고요?
네, 굿뉴스코 봉사단의 공식적인 활동 기간이 1년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탄자니아에서 더
지내기로 한 이유는 한국에 가기 싫기 때문이죠.(웃음) 한국에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
유망한 직업 등 온갖 경쟁 속에 갇혀 지내야 했거든요.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조차 인식
할 수 없었죠. 제 나이 때 대학을 다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졸업하면 직장을 얻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국과 정반대에 있는 나라에 와서 다양한 경
험을 해보니, 제가 그동안 얼마나 좁은 시야로 지냈는지 알 수 있었고, 미래를 바라보는데 좀
더 여유롭고 드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이곳에서는 걱정이 없어요. 탄자니아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여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탄자니아에서 많이 쓰는 말이 '하쿠나 마타타(문제 없어)'예요. 동부 아프리카
에서 널리 사용하는 스외힐리어인데 애니메이션 영화 '라이온 킹'의 대사로 나온 뒤 세게적
으로 유명해진 말이죠. 이곳에서는 도전과 새로운 일들의 연속이잖아요. 제 자신을 뛰어넘
고 보면 오히려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고 행복이 몰려와요. 앞으로 펼쳐질 제 삶은 '하쿠
나 마타타'입니다.
앞으로 탄자니아에서 게속 살고 싶으세요?
물론입니다. 내년에는 한국에 돌아가 치위생사 공부를 다 마칠 예정이고요. 이후에 탄자니
아에 다시 와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치위생사로 일하든, 미술을
가르치든,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아카데미를 진행하든 어떤 일이든 탄자니아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어요. 탄자니아는 제게 너무 행복한 곳이거든요.
오랫동안 염원했던 미술교육헉과 진학에 실패했을 때 '이제 내 인생은 끝났고, 여기가 나의
한계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최예은 씨. 돌아보니 자신에게 닥친 원치 않는 상황이 문제
가 아니라, 좁은 시야와 생각으로 스스로를 절망에 가둔 것이 문제였음을 알았다고, 그런 그
는 탄자니아에 와서 미술 선생님이 되었고, 다양한 도전들을 계속 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넘
어갔다. 불가능이러고 생각한 문제를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순간, 그 문제를 뛰어넘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 문제를 한 단계씩 넘어가면서 많은 경험치들를 얻은 것이다. 대
학교 입시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첫 번째 도전일 뿐이었다. 최예은 씨처럼 나의 한계라고
여겼던 일에 한번 도전해 보자!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내 앞에 펼쳐진 일들이 '하쿠나 마타
타'(문제 없어)일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