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4. 14:55ㆍ카테고리 없음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괴짜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
'게슈탈트 전황Gestalt Swytch'이라는 말이 있다. 이미지나 형태의 변화가 없는데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같은 것이 다르게 보이는 것을 뜻한다. 원래 심리학에서 나온 용어를 회
화의 세계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이다. 다양
하게 해석할 수 있는 재미를 일으키는 괴짜 화가를 소개한다.
다음의 그림을 얼핏 보면 평범한 정물화처럼 보인다. 검은 그릇에 양파, 무, 당근, 마늘 등 갖
가지 채소들이 가득 담겨 있다. 그런데 작품 제목이 '채소를 기르는 정원사'이다. '웬 정원사?'
하며 아무리 들여다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정원사가 기르는 채소라는 뜻일까?' 하며
고개를 갸웃한 참에 더 옆으로 고개를 젖혀보자. 아예 그림을 뒤집어 보자.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 수염 긴 아저씨. 바로 정원사가 등장한다! 검은 그릇은 모자가 되고
양파는 볼이 되며, 버섯은 입술이 되고, 무는 코가 된다. 똑 같은 형태인데 어떤 시각에서 보
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와 의미가 나타났다. 이것이 게슈탈트 전환이다.현대 미술에
서 많이 차용되는 이 화법으로 그린 작품은 놀랍게도 1590년 작이다.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1526~1593)의 작품이다.
보통 '초상화'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모나리자'처럼 우아한 그림이나 램브란트의 차분한
자화상들이 생각날 것이다. 다음의 두 작품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를 그린 초상
화이다. 같은 인물을 그렸다고 하기에는 표현 방법이 상당히 다르다. 요제프 하인즈가 그린
작품은 우리가 익히 아는 전형적인 초상화이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군
주를 신, 영웅, 성자로 묘사하였으며 그림을 통해 인물의 단점은 숨기고 장점을 부각하기 위
해 애써야만 했다. 요세프 하인츠의 그림은 그 특성에 부합한다.
하지만 아르침볼도의 작품 '베르툼누스'는 황제의 권위를 비웃는 초상화 같다. 황제의 이마
를 호박, 눈썹은 보리 이삭, 눈꺼풀은 완두콩, 볼은 사과, 입술은 체리로 표현했다. 우스꽝스
럽고 기괴하기까지 하다. 반전은 아르침볼도에게서 초상화를 선물받은 루돌프 2세가 매우
기뻐했다는 것이다. 황제는 이 작품을 받고 아르침볼도에게 팔라틴 백작의 작위를 하사했
다.
이전에 아르침볼도는 프라하 궁에서 궁정화가로 일하다가 루돌프 2세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은퇴 후 조국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루돌프 2세의 후원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초상화를 그려 보낸 것인데 작품 제목인 '베르툼누스'는 원래 고대 로마신화에 나
오는 계절과 식물, 변신의 신을 가리킨다. 즉, 그는 황제의 통치력으로 나라가 풍요로워졌다
는 공덕에 대한 찬양하는 뜻을 그림에 담았고 황제는 이를 간파한 것이다.
특이한 화가 아르침볼도는 1526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화가 비아지오의 아들로 태어났
다. 비아지오는 밀라노 대성당의 내부 장식을 맡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화가였다. 아르침
볼도는 아버지 밑에서 조수로 일하며 대성당에서 작업을 하다가 페르디난트 1세의 눈에 띄
어 신성 로마제국의 궁정화가로 임명받았다. 이후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까지 3대를
27년간 섬겼다.
아르침볼도의 초기작들은 평범하다. 전통적인 화법으로 일반적인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던
그의 화풍에 변화가 생긴 것은 막시밀리안 2세가 황제로 활동하던 16세기 중반부터였다. 이
시기에는 유럽 전역에 탐험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새로운 항로를 찾아 아프리카, 아메리
카를 탐험해서 신기하고 이국적인 것들은 유럽으로 가지고 왔다. 막시밀리안 2세는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수많은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전 세계 희귀한 동, 식물의 표본을 수집
하였다. 이는 아르침볼도에게도 새로운 영감으로 작용하여 그는자신의 작품 안에서 동, 식물
을 특이하게 조합하는 실험을 계속 해 갔다.
당시 막시밀리안 2세는 내부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패
하면서 그의 위상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무능력한 황제라는 비난이 뒤따랐다. 이러한 상황
에서 그는 긍정화가 아르침볼도에게 초상화를 요청하며 자신의 권위를 알려주기를 바랐다.
어려움에 처한 황제에게 힘이 되고자 아르침볼도는 고민 끝에 4점의 자화상을 선물했다. 그
것이 바로 유명한 '사계'이다.
연작'사계'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열리는 채소, 과일, 식물을 합성하여 사람의 형상
을 만들어 냈다. '봄'은 얼굴과 머리가 모두 꽃으로 이루어져 있다. 볼과 입술에 놓인 붉은 꽃
잎은 건강한 혈색을 드러내어 인물의 젊음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여름'은 여름철에 나오는
과일과 채소로 꾸며져 있다. 체리, 복숭아, 오이, 가지, 밀 이삭이 보이며 의상은 밀짚으로 만
들어졌다. 형상화된 것은 열정 넘치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가을'은 중년의 남자가 등장한다.
사과, 배, 포도, 곡식의 낟알을 합성하여 중년의 늠름한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은 주름진 노
인을 그려놓았다. 노인은 다르게 보면 나무 한 그루 같다. 두꺼운 나무통은 목으로, 가지와
잎은 머리카락으로, 나무에 난 버섯은 입술로 묘사되었다.
4점의 작품 모두 막시밀리안 2세를 펴현한 것이다. 신하들은 불경스럽다고 비난 했지만 그
림을 받은 황제는 화를 내기는 커녕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축제 때 그림과 같이 차려입고 등
장했고 아르침볼도에게 사본을 그리게 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보내기까지 했다.
그림 속에는 지구와 시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나오는데 이를 황제를 비유한 것은 황제를
대단히 높인다는 뜻이었다. 자연의 변화와 풍요로움이 왕의 은총 덕분이라는 의미도 담았
다. 또한 아르침볼도는 황제의 얼굴 옆면을 그렸다. 보통 초상화는 반 정면, 또는 정면으로
표현하지만 그는 옆면을 그림으로써 황제의 위엄을 살렸다. 고대 로마 시대 동전에 그려진
황제들의 얼굴 구도를 차용한 것이다. 얼핏 보면 알수 없지만 위트와 알레고리 속에 황제의
권위를 숨겨 놓았다.
당시 왕실의 신하들은 아르침볼도의 작품이 기괴하고 흉물스럽다고 손가락질 했지만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그의 아들인루돌프 2세는 아르침볼도를 총애했다. 그가 그린 초상화를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이들 황제가 당대에 예술, 과학 인문학의 후원자이며 최고의
예술품 수집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로운 문물에 열려 있었으며, 에술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각, 알레고리 너머 본질을 간파하는 감각과 유머를 가지고 있어서 아르침볼도가
바친 존경과 위트에 호탕한 웃음으로 회답할 수 있었다. 특이함, 자유로움, 기지, 상상력을
펼치는 한 에술가가 있었고, 그것을 받아주며 뜻을 펼치도록 무대를 만들어 준 조력자가 있
었던 것이다.
황제들의 지지 덕분에 아르침볼도의 작품 세계는 꽃피울 수 있었다. 그의 파격적인 초상화
는 퍼즐, 수수께끼, 기이한 것이 유행하던 르네상스 사회에서 인기를 얻었다. 아르침볼도의
죽음 이후에는 잊혀졌다가 20세기 넘어와서 각국 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되기 시작했다. 이 무
렵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재평가받았다. 1987년 베
네치아에서 열린 전시 '아르침볼도 효과'에서는 모더니티의 선구자로 주목받았다.
그의 친구이자 시인이며 역사가인 그레고리오 코마니니는 아르침볼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
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특별한 추함도 없다."
"아무도 비슷한 것을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이 그림들은 더욱 놀랍다."
가까이서 볼 때와 멀리서 볼 때가 다르며 똑바로 볼 때와 뒤집어 볼 때가 다른 아르침볼도
의 작품들, 숨겨진 뜻을 알고 나면 무릎이 탁 쳐지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들에서 대상
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과 즐거움을 얻는다. 미술 감상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아르침볼도의 작품 세계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채소와 과
일들만 보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권위 있는 황제의 모습과 만날 것인가? 삶을 대하는 태도
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일이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경우
를 우리는 수없이 목격한다. 긍정적인 사람은 불행한 일은 작게 보고, 좋은 일은 크게 본다.
부정적인 사람은 자꾸 안 좋은 쪽에서 서성거리며 괴로운 생각을 떨쳐 내지 못한다. 행복과
기쁨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산다. 모든 것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보는
이의 시각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을 우리는 아르침볼도의 작품 세계에서 은유적으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