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3. 17:28ㆍ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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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볼 줄 아는 사람
꼼꼼하고 집요한 성품을 타고난 나는 학교생활은 물론 사회생활 초반에도 내게 주어진 과
제들을 빈틈없이 마무리해야 직성이 풀렸다. 이렇게 하나를 파고드는 '나무 지향적' 성향은
신입 시절엔 제법 강점이 되었다. 업무에 서툴러도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회
사에서 믿고 맡겨주는 일들이 더 늘어갔다.
어느덧 평사원 시절을 거쳐 두 번 이직한 나는 현재 직급이 대리로, 8년차 직장인이다. 묵직
해지는 연차만큼 업무 범위와 책임영역은 점점 커져간다. 회사에서는 한두 가지 일을 꼼꼼
하게 해내는 것뿐 아니라, 연간계획과 중장기 전략까지 고민하고 실행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일간 단위가 아닌 월간, 연간, 3년, 5년, 10년까지 좀 더 넓은 단위로 계획하고 전체 그림에서
현 위치를 파악하며 조율해 가는 일은 멋지다. 하지만 더 큰 숲을 그려보라는 회사의 요구에
나는 가끔씩 '나무를 쳐 내느라 바쁜데 숲이라뇨?' 하며 속으로 머리를 가로젓곤 했다.
정신없는 대리에게 상무님이 건넨 말
홍보와 마켓팅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나는 기업 홍보, 사내 커뮤니케이션, 사회공헌, 브랜드
마켓팅 등 여러 분야를 경험했다. 현재는 지금까지의 업무들을 포함하는 '기업 커뮤니케이
션'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디에나 녹아드는 개념인 만큼 회사에서도 다
루는 일의 종류가 다양하다. 부서원이 많지 않아서 한꺼번에 챙겨야 할 내용도 많다. 내 앞에
심어야 할 나무는 점점 늘어나는데 품종은 또 어쩜 모두 다 다른지...."정신이 없다는 말을 입
에 달고 사는 것 같아 스스로 금지어로 정해두기도 했다. 장대한 비젼과 촘촘한 전략아래 착
착 실현하는 이상적인 KPI*는 아득해져 가고, 당장 눈 앞의 할일 리스트를 지워가기에 바빴
다. +KPI : Key Performance indicator의 약자로 핵심성과 지표를 말한다.특정 기간 동안 이
루고자 하는 목표를 정하고 해당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전략을
설정해 둔 것이다.
그러다 하루는 우리 조직을 총괄하는 상무님과 정기 면담할 기회가 생겼다.
업무적인 고민들을 털어놨다.
"정신없이 나무만 쳐내는 것 말고 숲을 보고 싶은데 잘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숲은 나같이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 보이는 거고요. 사원, 대리 때는 나무를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한 능력이죠. 잘하고 있어요."
상무님은 먼저 격려를 해 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어가셨다.
"숲을 보려면 일의 취지와 목표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 됩니다."
지금 이 업무를 왜 하는 것인지, 그래서 이루려는 목표물은 무엇인지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
하다는 것이다. 취지와 목표를 생각하면서 업무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중요도에 따라 주어
진 시간 내에 처리하는 연습을 해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시간 관리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의
식적으로 연습하지 않으면 절대 늘지 않는다며 업무가 몰리는 바쁜 시기일수록 의식적인 훈
련을 하면 좋다고 하셨다.
조 대리, 번아웃을 거부하다
마음에 에너지드링크를 마신 느낌이었다. 면담 후로 업무별 '취지'와 '목표'를 적으며 일하는
연습을 했다. 그 연습이 빛을 발한 것은 얼마 전 일이다. 일 년에 한두 번 일이 유독 몰리는 시
기를 지나고 있었다. 가지를 뻗쳐대는 각양각색 나무들 때문에 3주 연속 매일 같이 추가근무
를 해야 했다. 면담 효과로 마음은 달려 가는데 몸이 따라와 주지 못해 기어코 소화불량과 두
통이 찾아왔다. 그날 밤도 혼자 야근을 하다가 느지막이 사무실을 나와서 뻑뻑해진 눈을 끔
벅거리며 걸었다. 문득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까지 일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
이 들었다. 보통 이 문장 뒤엔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데?'가 이어지고 서럽다. 힘들다.
다 짜증나!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면서 '번아웃'*이 찾아오는 것이 샐러리맨들
의 정해진 경로다 그 흐름을 무시하고, 나는 면담 내용을 활용해 보기로 했다.
마음은 숲을 향하도록
회사 업무에도 취지와 목표가 있듯이 내 회사 생활에도 취지와 목표가 있지 않겠는가 노트
를 펴서 적기 시작했다. 나는 왜 회사 생활을 하는가(취지=목적=why). 이곳에서 이루고 싶
은 건 무엇인가(목표=결과=what). 내 회사 생활의 목적은 '집중 야근과 열일 끝에 기어코 내
가 맡은 업무를 잘 끝마치는 것'이 아니다. 곰곰히 적어가다 보니 '일을 통해 나를 훈련하고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 만들기'라는 1차적인 목적과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
람들에게 위로와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기'라는 2차 목적이 선명해졌다. 이 목적을 위해 회
사에서 얻고 싶은 목표 지점은 기업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처리해야 할 업무와 개인적인 상황들 같은 눈앞의 나무들을 잠간 벗어나 나만의 숲을 차분
히 그려보니 웬지 힘이 났다. 체력의 한계가 마음의 한계로 그대로 연결되지 않는, 기분좋은
경험이었다. 마음이 중심을 잡고 서 있으면 몸이 좀 지쳐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마
음이 바닥을 치면 몸이 회복되어도 진짜 '힘'은 나지 않는다. 마음이 지친 것 같다면 나는 지
금 이 일을 왜why 하는지, 무엇what을 얻고 싶은지 적어보자.
why를 이루기 위한 what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 수정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마음껏 나만의 숲을 그려보면 좋겠다. 그리고 힘이 필요할 때 꺼내보자. 내가 그려둔 숲이
선명할수록 마음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다. 우리에겐 나무에 광을 내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결국 더 멋진 숲을 만들어 가기 위한 나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글쓴이 조민지
90년대생 8년차 기업 커뮤니케이터. 서울대 언론 정보학과에서 공부하고 L사, C사 에서 실
무를 배웠으며 현재 H사 기업 커뮤니케이션 전략가로 활동하고 있다. 기업과 개인 구성원
간의 '더 좋은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답을 찾으면서 그는 배우는 설렘과 소
통하는 기쁨을 쌓아가는 중이다.